‘나의 다름이 다른 사람의 다름을 끌어들이는 예술’
Interview with 김지수 | 극단 < 애인 > 소속 배우
인터뷰어 | 천 샘
*본 인터뷰는 2023년 11월에 진행되었습니다.
천샘(이하 천): 큰 자족의 박수를 치면서 인터뷰 시작할게요. 정말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 인터뷰가 전 연구 과정의 마지막 수순이라, 인터뷰이를 오래 찾아다녔습니다. 선생님이 늘 1순위였는데, 현장에서 뵌 선생님은 장애 예술인들을 대변하는 ‘스피커’ 역할을 하시잖아요. 스피커 역할을 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다른 분을 먼저 찾아보고, 합당한 분을 찾지 못하면 연락드릴 ‘0순위’로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드린 사전 질문지에는 예술가, 연구자들과 진행한 집담회를 하며 나눴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4개월간 집담회를 진행해보니 제 생각보다 국민체조에 대한 기억이 많이들 다르더라고요. 의외로 즐긴 분들도 많았고 그래서 진행하면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연구의 마지막이신 선생님께도 동일하게 유년 시절부터 되짚어보면서 본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은데요. 먼저 선생님의 거주지, 공간, 그리고 ‘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죠. 거주지가 장애인 시설이나 집이었을텐데, 공간의 특성에 따라 내가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주변에서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을 것 같습니다.
김지수(이하 김): 저는 어린 시절, 18살까지 가족들과 집에서 지냈어요. 제도권 교육을 받은 적은 없고요. 모두가 일을 나가거나 학교에 가면 저는 집에 혼자 있곤 했죠.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고요. 13살 이후로는 어머니 가게에 딸린 방에서 혼자 있거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언니네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어요. 방 안에 혼자 있다 보니 제가 어렸을 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심심해”였어요. 그래서 라디오를 듣고 노래를 많이 불렀죠. 거울 보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는데, 그때는 제 몸을 잘 몰랐어요. 아무도 가르쳐주거나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왜 학교를 못 갔는지 엄마 아버지께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늘 힘들게 일하고 밤늦게 지친 몸으로 들어오는 엄마에게 뭘 물어볼 수 없었던 거죠.
아침이면 가족들은 다 나가고 저 혼자 있었어요. 바로 위에 연년생 언니가 있었고요. 언니가 학교 가는 걸 보고, 돌아오면 숙제하는 걸 보면서 저는 한글을 배우게 됐죠.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와 친구들이랑 놀면 저를 업고 나가 같이 놀기도 했고요. 몸에 대한 인식은 그때 크게 없었는데, 13살 전까지는 유모차를 탔고 13살 때 처음 휠체어를 탔어요. 그전에는 안거나 업고 다녔죠. 제 체격이 작았으니까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으로 시간대를 가늠했어요. 몇 시쯤이면 햇볕이 어떤 색과 모양으로 방을 비추는지, 그런 것들요. 그리고 18살 때 특수학교에 갔어요. 19살이 되면서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거죠. 그때는 같은 뇌병변 장애인, 지체장애인, 발달장애인 등 다양한 유형의 학생들을 처음으로(병원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천: 그럼 특수학교 시절에 대해 좀더 여쭙고 싶은데요. 비장애인 무용수들과 이야기를 했을 때, 이른바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는 시기가 88올림픽과 겹치더라고요. 학교를 다니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 여러 움직임에 동원되다가, 나중에 시대를 복기하며 집단적으로 깨달았답니다. 왜 쉬는 시간마다 교내 방송으로 운동장에 나오라고 해서 메스게임 연습을 그렇게 시켰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 다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그 시대와 맞물려 생각해보니 올림픽, 그 전에는 아시안게임과 맞물려 대규모 국가 행사에 동원될 가능성에 염두가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춤이나 움직임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꼭 국민체조가 아니어도 듣고 싶습니다.
김: 88올림픽이 제가 17살 때였어요. 저는 언니를 통해 학교에서 뭘 했는지 듣곤 했는데, 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달리기 선수였거든요. 그래서 메스게임, 카드 섹션 같은 걸 초등학교 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행사장에 직접 가는 건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연습하고 늘 늦게 오더라고요. 제가 언니만 기다리니까 “왜 이렇게 늦게 와?” 하면, “연습하고 왔다”고 하고요. 운동회 때 보여주는 부채춤도 했고요. 언니가 부채를 가져오면 저는 그걸 가지고 놀곤 했는데 언니는 다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잘하는 사람은 가운데 서고 못하는 사람은 뒤나 맨 끝에 서고…, 언니는 달리기 선수라 몸을 잘 써서 가운데에 섰죠. 그런데 키가 좀 작아서 아쉬워하던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저는 18~19살에 특수학교에 갔는데, 재미있던 건 아침 조회 시간에 국민체조를 했다는 거예요. 음악을 틀고요. 그 순서를 외워야 했죠.
중학교 1학년으로 들어갔는데, 그게 체육 시험에 나오고 실기시험을 본다는 거예요. 저는 수동 휠체어를 탔고, 몸을 움직여본 적이 많지 않았거든요. 지체장애나 소아마비 등으로 목발을 짚는 친구들은 어렵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데, 저는 할 수 없는 게 많았죠. 그래서 시킬 때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걸로 시험을 본대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못하는 건 어쩔 수 없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를 보고 점수를 준다”는 거예요.처음엔 숨쉬기부터 하고, 팔 들어 올리고… 그런 순서를 다 따라 했죠. 그때 들었던 생각은, 늦게 학교에 들어간 19살의 제가 ‘맞지도 않는 걸로 평가받는다’는 것, 그리고 다들 장애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경증인 친구들은 그걸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중증 장애인들은 못 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더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거였어요. 사실 삶에 아무 필요 없는 건데 말이죠. 실기를 못하니까 필기라도 틀리지 않으려고 순서를 다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천: 그럼 국민체조를 얼마나 하셨어요?
김: 19살에 중1로 들어가 3학년까지 다니고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1학년 때는 그걸로 시험을 봤고, 2~3학년 때는 아침 운동으로 틀어놓고 했죠. 저는 어느 순간부터는 안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해도 도움도 안 되고 운동도 안 되는데 왜 해야 하나 싶어서요. 2~3학년 때는 거의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있었고, 교실에서 하니까요.
천: 학교마다 다르긴 한데, 혹시 우유 급식이 나왔나요?
김: 우유도 나왔죠.
천: 우유가 국민체조 직전에 나와서 마시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김: 제가 알기로는 그렇진 않았고, 우유는 둘째 시간 끝나고 나왔던 것 같아요. 체조는 아침에 했고요.
천: 저희 학교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11시가 되면 우유 궤짝이 반마다 문 앞에 ‘탁탁탁탁’ 내려놓아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우유가 몸에 안 맞는 체질이라 궤짝 소리만 나면 토할 것 같았죠. 우유 비린내와 알 수 없는 구령 속에 시작되는 오전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경기가 날 정도였답니다. 누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애들이 더위로 퍽퍽 쓰러져도 상관없이 시키던 기억이 있어요. 잘하는 애들은 단상에서 시키고.
김: 저희 극단에(지금은 잠깐 쉬고 계시지만) 어선미 선생님이라고 연세 있는 여성 뇌병변 장애인이 계세요. 그 선생님은 일반 학교를 다니셨는데, 10대 때 88올림픽 즈음 메스게임을 학교에서 단체로 연습했대요. 그런데 본인은 그걸 잘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집에 와서 매일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자꾸 소외되는 거죠. 그런 이야기는 경증이고 일반 학교를 다녔던 장애 여성분들을 인터뷰하시면 들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때 ‘운다’는 걸 잘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그러실 수 있겠다” 정도로 짐작을 하게 됐죠. 그만큼 힘드셨던 상황이었던 거예요. 그 일 때문에 너무 죽고 싶었다고도 하셨어요.
특수학교는 장애 유형이 다양하니까 뭔가를 ‘다 같이’ 하는 게 참 어렵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중3 과정까지 다니고 “여기 더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끊임없이 뭔가를 시킨다는 점이었죠. 특수학교, 재활원… 재단 시설이 같이 있다 보니 2~3개월마다 행사가 계속 열려요. 바자회도 하고, 뭐도 하고… 그러면서 학생들을 방과 후까지 계속 동원하는 거예요. 할 일이 없으면 우울해질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엔 ‘이거 말고 해야 할 게 많은데’ 싶었죠. 사회적인 것에 대해 공부시키는 게 더 필요해 보였는데, 단순한 걸 시키고 그 안에서만 계속 굴려요. 예전엔 시화전 같은 것도 있었잖아요. 그런 걸 시키고… 그러다 보면 할 수 있는 아이들은 계속 바쁘고, 못하는 아이는 계속 못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계층이 나뉘고, 중증 장애인들은 상대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간은 너무 많고, 친구도 없고. 저는 그게 정말 이상했고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 더 있다가는 사회에 나가 잘 지내기 어렵겠다고요.
천: 선생님 책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을 읽고 왔는데, 선생님 말씀을 직접 들어보니 또 느껴지는 감흥이 상당히 다르고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연극 쪽에서는 발언과 예술이 운동성과 연결된, ‘극단 애인’이라는 "막강한" 예술단체가 있죠. 선생님께서 만드신. 책에서도 나오지만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김: 네, 17년이요.
천: 그 시간 동안 연극의 저항성과 장애 예술이 겹치며 더 큰 발언의 지점을 만들어온 것 같은데요. 그런 모습을 보며 부럽기도 했습니다. ‘장애인은 춤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뇌병변 장애인 남자분에게서 들은 적이 있고, 책에서도 선생님은 ‘당사자성’을 강조하시는데요. 즉 당사자들이 모여 현실에 대한 발언을 만들어내는 것, 그 맥락에서 장애 예술과 장애인 운동을 함께 가져갈 가능성… ‘극단 애인’이 그 지점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하는데, 왜 무용 쪽에는 그런 단체가 없을까, 늘 답답했습니다. 요즘에는 많이 바뀌고는 있지만, 여튼 그러한 맥락에서 '극단 애인'의 대표직을 내려놓으신 이유와 다음 세대 장애 예술인들이 키워갈 연극의 가능성, 그리고 옆 장르인 무용에서도 비슷한 가능성이 움틀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첫 번째, 춤에 대한 이야기요. ‘장애인은 춤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건 사람마다 정말 다를 거예요. 저는 어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예전에 ‘가요톱10’에서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아주 좋아했죠. 다만 제가 춤을 출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시도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특수학교에 다닌 어느 해 연말 송년회 때, 넓은 평상 같은 공간에서 다 같이 모여 과자도 먹고 놀다가, 마지막에 불을 어둡게 하고 댄스 음악을 틀어줬어요. 저는 음악이 좋아 몸을 조금 흔들었는데, 거기서 엄청 춤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제 친구 중 한 명은 저처럼 휠체어를 탔는데 저보다 훨씬 몸을 잘 움직였고, 춤을 너무 좋아했어요. 반면 저는 내면화된 억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국민체조 같은 획일화된 움직임을 못 하니까 신체 자부심을 떠나 몸의 ‘고유성’을 인식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부끄럽다고만, 못한다고만 생각했죠. 신나는 음악이 너무 좋아도, 그 친구만큼 신나게 몸을 못 움직였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너무 자유로웠고, 저는 “어떻게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오래 생각했죠. 그러면서 ‘나도 사실 좋아하는구나’를 알게 됐어요. 30대 초반엔 해외 댄스팀 공연을 매년 보러 다니기도 했어요. 너무 좋았죠. 그러면서 ‘장애인이 춤을 춘다면 어떻게 출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저는 장애인이 춤을 못 춘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 친구가 저에게 많은 걸 열어준 셈이죠. 저희는 연극을 하지만, 연극 놀이 수업에서 몸풀기로 춤을 추곤 해요. 춤은 결국 몸을 자유롭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의 리듬을 통해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부위를 움직이며 자유를 얻는 것. 다만 “자유롭게 움직이면 돼요”라는 말을 이해하고 곧바로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아요. 그 지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오래 찾고 있는 ‘고유성’—몸의 고유성은 언어이기도 하고 움직임이기도 한데, 그 고유성이 조금 빠르게 운용되면 춤이 된다고 생각해요.
장애 예술 분야에 계신 분들은 다방면의 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아, 움직임도 많이 해요. 그러면서 우리 역시 내 몸의 고유성을 인식하고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 시도할지 고민하고요. 그게 꼭 ‘무용’이 아니더라도, 하다 보면 더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럼 이것을 무용이라 할 수 있나? 움직임과 무용은 어디서 얼마나 다르고 같은가? 이런 고민이 계속 있어요.
개인적 성향으로는 ‘움직임’보다 ‘춤’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춤은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거든요. 다만 움직임 수업의 경우, 대개 비장애인 선생님들이 기준을 갖고 계세요. 다른 몸, 다른 움직임을 보지만 그 안에도 여전히 ‘기준점’이 있다고 느껴요. 한 선생님이 “장애인과 움직임 수업을 하며 내가 무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균형, 수십·수백 번의 반복 같은 게 의미 없을 수도 있구나”를 느꼈다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결국 작업을 보다 보면, 선생님들의 기준은 다시 그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해요. ‘다름’의 인정을 넘어 ‘고유성’으로 가려면 당사자의 연구가 더 깊어져야 하죠.
천: 동의합니다.
김: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을 뿐, 그 외의 불균형—시간 속에서 변화된 몸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전면에 둔 작업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고 봤어요. 그걸 열어줄 수 있는 건 ‘중증 장애인 무용수’의 등장이 아닐까 합니다. 무용수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춤’에서 출발하면 더 좋겠고요.
천: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을 보면 ‘장애 예술인의 신체적 가용성을 더 넓히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훈련 매뉴얼’을 고민 중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서울문화재단 웹페이지에서 다운받은 「예술인연구모임 보고서」에는 아직 매뉴얼은 없더라고요.
김: 아직 안 나왔어요. 훈련이 거기까지 못 갔고, ‘고유성’—장애인의 몸이 지닌 고유성과 연기에 대해 프로젝트로 열심히 찾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비장애인들이 하는 ‘펠든크라이스’ 수업도 듣고, 장재희·김혜리 선생님께 수업을 받으며, 비장애인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과 변화가 과연 장애인의 몸에도 맞는지, 우리 몸에는 어떻게 적용해 우리의 트레이닝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다만 아직 문서로 나온 건 없어요.
천: 선생님은 ‘예술가’이자 ‘장애 여성’이라는, 이른바 "쎈~" 타이틀 두 개를 갖고 계세요. 두 정체성이 맞물리며 쌓인 삶의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그 지점에 선생님의 지난 활동들을 이끌어온 힘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김: 이 질문이 가장 어려웠어요. 물론 저는 장애여성이고, 연극이 좋아서 연극을 합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여성주의적 감각이 없진 않죠. 다만 그걸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고요. 저는 중증 장애 여성이라 사회적 기대에서 벗어나 있다고 봐야겠죠. 예컨대 결혼·연애·출산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요. 저는 그런 관심이 크지 않았어요. 호감 가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회적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가족들도 결혼에 대해 강요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선 자유로울 수 있었죠.단체를 오래 운영하며 느낀 건,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저의 생활과 중요한 일—연극과 극단 애인이었다는 거예요. 연극 안에서도 남성 배우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애 여성 배우들은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배려받지 못한 채 연극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극단은 지금도 남성 배우가 많고, 초반 7~8년은 남성 배우들만 있었어요. 누군가는 제가 남성 편력이 있어서 그렇냐고 농담처럼 말하더군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보는구나” 하고 고민하게 됐죠. 왜 여성들이 적을까 생각해보니, 자립생활센터에서 동료상담가로 활동할 때도 여성 참여가 늘 적었어요. 가족과 살면 가족의 통제가 있고, 결혼했다면 가정을 돌봐야 해서 끝까지 가기 어렵다는 거예요. 저희 극단에서도 여성 배우들이 오랫동안 활동하기 어려웠고요. 한동안은 제 탓인가 자책도 했지만, 연극은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장애인이 자유롭게 참여하려면 환경적 지원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예외가 너무 많아요. 예전에 ‘장애여성공감’ 배우님들과 작업했을 때도 그런 걸 느꼈고요. 저희 배우들과 페미니즘 책도 함께 읽으면서, 서로 다른 점들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천: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나는 규범에서 의도적으로 탈락되어 온 몸”이라고 하셨죠. 그렇게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탈락시켜온 몸’의 역사—이 맥락이 예술과 결합했을 때 어떤 가능성이 생길까요? 규범적이지 않은 몸이 예술을 수행할 때 발견되는 ‘뜻밖의 가능성’이라는 게 있을까요? 극단 애인의 작품들이 있지만, 그 외에 의도치 않은 가능성들도 더 있을지요.
김: 지금도 장애인의 몸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고, 여성의 몸은 더욱 드러나지 않죠. 움직임이나 무용에서 장애인이 무용인들과 함께하는 과정은 몸을 드러내고,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신체를 드러내며 존재도 드러나는 거죠. 그런데 ‘다르다’를 보여주는 데서 끝나면 안 돼요. 결국에는 저는 ‘모두 다 다르다’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규범에서 탈락’이라는 표현에서 ‘탈락’은 곧 배제라고 봐요. 규범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해당하지 않으면 배제하는 것. 그렇게 가면 인류는 멸망한다고까지 생각해요. 현실만 봐도 멀지 않았잖아요. 우리는 다 늙고, 더 다양한 몸이 많아질 텐데, 획일적인 것을 강화하면 안 되죠.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나의 다름이 다른 사람의 다름을 끌어들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장애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와 움직임을 한다는 것은 ‘나의 다른 몸’을 보여주는 일이에요. 관객도 거기서 멈추지 말고, 그 무대에 서 있는 배우든 무용수든 간에 또 다른 영역을 함께 넓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에요. 사실 움직임에 대한 인터뷰는 저도 처음이에요. 세미나 발표 요청이 와도 자주 안 가거든요.
오늘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는 저는 무용을 잘 모르기 때문이고, 결국 예술 안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다름의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아름답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아름답다’를 궁극으로 삼으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그런 규범적 아름다움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해요.